내일은 제17대 대선 날이다. 아침 일찍부터 유권자들은 저마다 한 표를 행사하고, 밤 11시쯤이면 당락의 윤곽이 드러난다고 한다. “○○○후보가 ○○○명의 유효투표수 중에 몇 ○○%의 득표율로 당선이 확실하다”는 뉴스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 험난한 정쟁과 파란 속에서도 대한민국을 5년간 이끌어갈 수장이 등극하는 순간이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핵심 장치이고, 인류가 발명해낸 최고 걸작 중에 하나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 승자가 모든 국민을 대표할 만한지를 원칙적으로 따져보면 의구심이 드는 대목들이 있다. 10명의 후보 중에 누가 당선되건 1위를 제외한 나머지 9명 후보를 찍은 표는 사표(死票)가 된다. 1위 대표자를 만드는데 전혀 기여하지 못한 ‘죽은 표’다. 그래서 패배한 후보를 찍은 유권자는 승리한 후보가 자신을 대변하지도, 더구나 나라를 대표하지는 못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당선자가 국가 제도에 따른 ‘법적 대통령’은 될 수 있을지언정, 자신의 정치적 대표성을 위임한 ‘정치적 대통령’은 되지 못한다고 여길 수 있다는 말이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늘 대통령을 만드는데 기여한 ‘산 표’보다 그렇지 못한 ‘죽은 표’가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1987년 직선제 회복 이후 대통령 당선자의 득표율은 노태우 36.6%, 김영삼 42.0%, 김대중 40.3%, 노무현 48.9% 등이었다. 지난 네번의 대선에서 1위 득표율을 제외한 63.4~51.1%가 사표였다고 볼 수 있다. 이들 선거의 투표율이 70~89% 수준이었으니까 실제로 기권자까지 포함하면 전체유권자 중에 사표가 차지하는 비중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이렇듯 ‘많으면서도 얻지 못하는 표’가 바로 사표다. 통상 선거에서 유권자들 사이에 자신의 뜻과는 맞지 않지만 당선될 것 같은 후보에 붙는 ‘밴드왜건 효과’, 또는 역으로 약한 후보에게 동정표를 던지는 ‘언더독 효과’가 나타나는 이유도 이런 수렁에 빠지지 않으려는 자구책인 셈이다.

그러나 ‘사표’의 운명이 그렇게 비극적인 것만은 아니다. 선거제도의 역사는 크게 보면 사표의 모순을 해결하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가 찾아낸 최상(最上)의 제도는 개인의 자율과 집단의 자치를 모두 성취하는 만장일치의 직접 민주주의다. 하지만 그 실현 가능성이 어려워 마련한 차상(次上)의 제도가 다수결과 대의제를 통해 승자독식의 권력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다수결로 결정된 권위와 개인 자율 사이에 일종의 타협을 본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 모순과 충돌 가능성이 해소되는 게 아니어서 루소의 언명처럼 ‘대의제란 자발적인 (국가의) 노예보다 나을 게 없다’는 혹평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 문제를 고민한 나라들에선 ‘사표 구하기’에 골몰했다.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지역 대표제 대신에, 정당이 전국 후보자를 낸 뒤 전국 득표수에 따라 배정하는 정당명부제가 나왔다. 우리의 비례대표 국회의원도 이를 원용한 것이다. 대선에서도 유권자의 대표성을 최대한 늘리기 위해 결선투표제가 도입됐다. 아예 대통령과 총리 선출을 이원화하거나, 정당마다 돌아가며 대통령직을 맡는 나라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노력을 했는가. 이렇게 자문해보니 ‘사표의 모순을 줄이려 하기는커녕, 오히려 차상의 제도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다음 정부에선 개헌과 정치관계법 개정 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뤄질 것이다. 하지만 승자 독식의 논리에 매몰된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더 나은 민주주의 방식을 찾을 수 없다. 나랏일에 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반영되게 하는 것, 그게 민주주의다. 다시 5년이 흐른 뒤 사표의 우울함에서 벗어나 저마다 자부심을 느끼며 투표장을 찾아가는 풍경을 그려보는 것은 그냥 몽상가의 꿈일까.

[[오승훈 / 정치부 차장]] oshun@munhwa.com